손오공 온라인 게임 ㈓ 오리지널 바다이야기 ㈓∈ 72.rxv228.top ㎝[서부원 기자]
중학교 내신 성적 백분위 0.7%와 95%의 아이가 같은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다. 중학교 3년 동안 전교 1등을 독차지한 아이와 꼴찌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는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 거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 둘의 격차가 나날이 커져만 간다.
수업하는 교사는 괴롭다. 강의의 수준을 어디에 맞춰야 할지 난감하다. 상위권에 맞추면 하위권 아이들은 수업 내용을 당최 알아듣지 못하고, 하위권에 맞추면 상위권 아이들은 지루해하며 시간이 아깝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수업도 수준이 엇비슷해야 가능한 법이다.
그렇다고 중간에 맞추기도 뭣하다. 자칫 게도 구럭도 다 잃을 수 있어서다. 교사들이 이구동성 말하는 가장 '교육적인' 수업 방법
개인회생파산 은 학습 목표에 맞춰 핵심 내용을 설명한 뒤 수준에 맞게 개별적으로 지도하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이상'일 뿐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줄 세우기 만연한 교실... 괴로운 교사들
직장인마이너스통장서류 ▲ 교사 1명이 주어진 시간에 25명의 아이를 일일이 상대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자료사진)
ⓒ taypaigey on Unsplash
울산신용회복 교사 1명이 주어진 시간에 25명의 아이를 일일이 상대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자면 내용에 대한 설명과 사용하는 어휘부터 달라야 한다. 교과서를 읽을 순 있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현재로선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보수 오해할까 싶지만, 상위권과 하위권을 따로 분반하자는 게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역대 정권마다 '교육의 수월성' 운운하며 줄 세워 나누기에 급급했다. 학교를 구분하고 같은 학교 내에서도 수준별 수업을 진행했지만, 예외 없이 교실의 황폐화로 귀결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
핸드폰 회선조회 '는 그 명징한 사례다. 이후 국제고, 특목고, 자사고, 자공고, 일반고, 마이스터고, 특성화고 등 그 이름조차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학교들로 분화됐다. 말이 좋아 다양화지, 기실 성적에 따른 고등학교의 서열화였다.
역대 정권의 교육개혁은 후유증만 남긴 채 대부분 용두사미로 끝났다. 대한민국 교육의 난맥상은 조물주가 와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자조만 남았다. 사교육비를 절감하겠다는 목표를 내걸면 되레 사교육비가 늘어났고, 지방대를 살리겠다고 외칠수록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이젠 누구도 정부의 교육개혁 의지를 믿지 않는다. 교사인 나는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 소박한 기대마저도 허황한 꿈이 되고 있다. 여전히 대입 제도 하나만 손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걸로 믿는 이들이 태반인 현실에서, 교육은 방향타를 잃고 만신창이가 됐다.
올해 사교육비가 사상 최고액을 찍었다고 언론은 아우성치지만, 정작 아이들의 학업 역량에는 큰 변화가 없다. 언뜻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느낌마저 든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학원에 가고, 교육과정과 대입 제도가 바뀔 때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불안한 마음에 더욱 사교육에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이다.
다만, 근래 들어 확연히 달라진 게 있다. 대입이 고등학교의 존재 이유인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지만, 교실 안을 들여다보면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상위권과 하위권의 성적이 양극화하는 상황에서 전쟁 같은 대입 경쟁이 '그들만의 리그'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30%! 대충 가늠해 본 대입 경쟁자의 비율이다. 모두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인문계고등학교를 선택했다지만, 나머지 70%는 대입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거칠게 말해서, 의치대와 '인 서울' 대학, 지방 거점 국립대에 진학이 가능한 정도만 대입에 관심을 둘 뿐, 대다수는 '남의 이야기'다.
▲ 교육과정과 대입 제도가 바뀔 때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불안한 마음에 더욱 사교육에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자료사진).
ⓒ ruben18rodriguez on Unsplash
지방 거점 국립대 진학 가능권인 30%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학교 설명회 때의 진학 실적 '기준선'이기도 하다. 그 아래 대다수 대학은 '기타'로 분류되고, 소개조차 되지 않는다. 이는 학교 교육의 실질적 대상과 목표가 상위 30%에 맞춰져 있다는 점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멸칭일지언정 '지잡대'라는 말이 공공연했지만, 이마저도 듣기 어려워졌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가는' 대학이라는 뜻에서 이젠 '아무나 가는' 대학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값비싼 등록금이 문제일 뿐, 성적이 모자라 진학하지 못하는 '지잡대'란 없다.
'지잡대'의 평준화도 눈에 띈다. 학벌 구조에 따른 대학의 서열화도 지방의 거점 국립대에서 끝난다. 예전에는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는다'거나 '지잡대'간의 서열은 서울로부터의 거리가 기준이라고들 했다. 지금은 '도토리 키재기'라는 조롱만 난무할 뿐이다.
이 지경인데도 모든 가계가 휘청이도록 사교육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다. 어차피 한 줄로 세우면 1등과 꼴찌가 나오기 마련이고, 사교육이 당신의 자녀를 '일취월장시키리라는 기대'가 별로 없는 데도 막무가내다. 매일 학교로 등교하듯 학원에 등원하는 게 일상이 됐다.
공동체는 무너지고, '망했다' 하는 아이들... 이게 정말 최선일까
하위권 아이들도 선선히 말한다. 매일 밤늦게까지 학원에 다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고. 자기만 다닌다면 몰라도, 안 다니는 친구들이 없는데, 무슨 재주로 성적을 올릴 수 있겠느냐고 되레 반문한다. 성적 향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접었고 '현상 유지'가 목표라는 거다.
그들은 애초 1등과 꼴찌는 정해졌다고 여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서열을 뒤집는 건 고사하고 격차를 좁히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미 공고화한 학교 성적은 그들의 '신분'과 '서열'을 공인해 주는 도구일 뿐이라며, '이생망(이번 생애는 망했다)'을 입버릇처럼 되뇐다.
둘의 격차가 벌어질수록 교실은 더욱 파편화한다. 친구 관계도 성적에 따라 형성되기 일쑤이고,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경우도 흔하다. 심한 경우, 이쪽은 저쪽을 '잘난 체 한다'고, 저쪽은 이쪽을 '학습 분위기를 망친다'고 서로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협동학습을 위한 모둠활동은 언감생심이다.
▲ 요즘 아이들은 '공동체'라는 말 자체를 어색해한다.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아이들도 있다(자료사진). @ madisonfisher9
ⓒ dre0316 on Unsplash
올곧은 민주시민을 육성한다는 교육의 목표가 무색하다. 예전에는 '학교 공동체'라는 말이 익숙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공동체'라는 말 자체를 어색해한다.
수업이든 놀이든 함께한 경험이 많지 않아서다. 드물게는, 같이 해야할 과제를 그냥 혼자 해결하겠노라며 모둠활동을 거부하는 아이도 있다.
파편화한 교실에서 교육은 '동그란 네모'를 그리는 일이 됐다. 고학년으로 올라가고 상급 학교로 진학할수록 격차가 벌어지는 현실을 교육이 조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무기력에 빠진 교육이 양극화한 현실을 방치한 결과라는 지적엔 모든 교사가 동의하리라 본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교실 내 상위권과 하위권의 묘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 모두 자존감에 커다란 생채기가 나 있다는 것.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하위권이 열패감에 길들어있다면,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상위권은 무한 경쟁의 쳇바퀴 속에 열패감을 겪는다는 점이다.
굳이 차이라면, 하위권이 '과거 완료형'이라면, 상위권은 '현재 진행형' 열패감이다. 종국엔 모두 패자가 되는 경쟁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몰아넣고 있는 셈이다. 학벌 구조를 정점으로 한 한 줄 세우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아이들의 상처 입은 자존감은 회복될 수 없다.
열패감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쉽게 공유되는 가치가 바로 극우다. 무한 경쟁은 불가피하고 성적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하는 상위권과 공부 못한다고 학창 시절 내내 괄시를 받아온 하위권의 스트레스와 분노는 극우의 '연료'가 될 수 있다. 교실에서 '극우의 꿈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의 스트레스와 분노 지수를 낮추는 게 급선무다. 지금 한가하게 대학 진학 실적 운운할 때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지난 '12.3 윤석열 내란 사태' 이후, 극우 세력의 준동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교육의 목표를 깊이 성찰해야 할 때다.